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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소설] 행복한 하늘 마당에 황토색 이층집 4장2003년 총무로 마을 임원이 되다

귀농한 삶이 참 춥고 서글펐던 2002년의 연말에 마을총회가 열렸다.

  
시골의 연말총회 때는 마을잔치가 열리고 집집마다 한두 사람씩 나와 마을 살림살이 결산을 하고 새로운 마을 이장과 임원진을 뽑는 시끌벅적한 날이다.
  
마을 이장이란 동네에서 생기는 대소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어른의 역할을 하는데, 나는 생전 처음으로 마을회의에 참여해서 이장을 뽑았다. 
  
그리고 새마을지도자와 마을 총무 운영위원 등을 뽑는데, 운영위원회에서 젊은 사람이 고향에 다시 들어왔으니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나보고 마을 총무(겸직 새마을지도자)를 보라고 했다.
  
사실 고향에 들어오면서 뭔가 마을을 위해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이왕 농사꾼이 되었으니 당연히 마을 일도 같이 한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일이 2003년 한여름을 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마을 총무의 또 다른 업무는 동내 수돗물을 관리하면서 수도요금을 걷고 수도가 고장 나면 수리도 하고 길흉사가 나면 소소한 일들을 도와주곤 하는 단순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업무가 그해 3월 동내 한가운데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면서 변해버렸다. 
  
사전에 동의도 없이 갑자기 레미콘 공장이 들어온 것이었다. 인근 동내에 레미콘 공장이 많아서 주변 주택이나 농장에 큰 피해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우리 마을 주민들은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레미콘 공장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라도 가면 여기에서 어떻게 사냐며 되묻곤 했었는데, 한 여름이라도 문은 항상 꼭꼭 닫혀있었고 창문턱에는 먼지가 쌓여있어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공장에서 주는 피해 보상금과 대부분이 공장에 관계된 직업을 가졌기에 서로 묵인 하에 살고 있었다.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명백한 사실을 잘 알고도 허가가 
났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사실은 몇몇의 묵인 하에 소리 소문 없이 허가가 났고 일사천리로 공장이 건설된 것이었다. 
  
앞으로의 피해는 불 보듯 뻔했다.
  
근처에 공장이 없는 청정지역 마을에 레미콘 공장으로 인하여 산딸기 열매에는 시멘트 가루가 뭍을 것이고 하우스는 먼지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창문을 열거나 빨래를 말리는 것도 힘들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깨끗한 마을에 생긴다는 것인가. 도저히 이해가 불가하였다. 여기는 낙동강 주변 청정지역이라 일반 공장도 허가가 안 나는 곳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급하게 ‘레미콘 공장 설치 반대 민원인단’을 구성하여 면사무소로 찾아갔다.
  
“이게 뭔 일이오? 누가 허가를 해주었소!”
  
저마다 한마디씩 분노하여 내뱉으며 동내 사람들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항의를 했고 놀란 면사무소 직원들과 면장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배경에는 근처에 부산 대구 구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레미콘 공장이 필요해 갑자기 허가가 난 것이고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게 또 뭔 헛소리인가 인근 마을에 레미콘 공장이 3개나 있다.
  
“그곳을 사용하면 되지 청정한 마을 입구에 도대체 레미콘 공장이 말이 됩니까?”
  
나는 총무로써 마을 대변인이 되어 이유를 물었고 동네 주민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주민들이 다그치자 면사무소는 순간 혼란에 빠져 다른 업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지자 김해시청에서 담당 공무원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일의 심각성을 간파한 담당 공무원은 대표 몇 명을 불러 간담회를 하였고 이윽고 한마디 내뱉었다.
  
“협의를 합시다. 이거 5년 공사 끝나고 나면 공장 철수 시키겠습니다. 약속합니다.”
  
“그럼 5년 동안 우리 마을은 ‘시멘트 가루를 먹고살아라’ 이겁니까?”
  
“그럼 어떤 조치를 해 드릴까요?”
  
“조치 필요 없습니다. 상식이 필요합니다. 애초에 여기에 레미콘 공장이 들어온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누가 여기에 동의를 했습니까?”
  
(사실 처음에 이상한 조립식 구조물이 들어올 때는 큰 창고를 짓나보다 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레미콘 주탑이 올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알았지만 마을에 뭔가가 들어오려면 이장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결국 우리 마을 이장이 어떤 방식이던 허락하였고 ‘촌사람이 뭐 별 수 있겠어’라는 심정으로 사욕을 채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때의 이장은 횟집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고 마을에 이사를 온 이웃 주민으로 동내 누나의 남편이었는데 그 누나 어른의 입김으로 마을의 법칙을 무시하고 1년도 안된 이주민에게 이장직을 맡긴 것이었다.)
  
대충의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마을 임시회의를 소집하였고 이미 이장의 과오로 진행된 사실은 안 주민들도 총무인 나에게 레미콘 허가 취소에 대한 거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장은 더 이상 관여할 수 없었고 레미콘 공장 철수를 위해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하였다.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동내 후배의 어머니는 울면서 하소연을 하였고 평생 농사밖에 모르는 후배도 다음날 찾아와서 “형님 살려주세요. 공장 주변에 농사가 5000평이고 집도 코앞에 있습니다. 농사도 힘든데 레미콘 공장이 가동되면 숨이나 쉬고 살겠소! 또 누가 우리 산딸기 사 먹겠소! 하우스도 2000평이나 되고 농사는 포기해야 할 판인데 누구도 책임질 사람은 없소”라고 읍소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막을 테니 포기하지 말자고 했다. 그리고 다시 시청 직원들과 레미콘 사장 마을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무리 허가가 났더라도 아무리 국책사업일지라도 마을 주민에게 일방적인 피해를 주는 이런 사업은 반드시 철수되어야 합니다.”
  
몇 번을 만나도 몇 달을 만나도 우리 마을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6월 한참 산딸기를 따고 있을 즈음 결국 시청에서 반쯤 백기를 들고 나왔다. 
  
앞으로 이행 허가는 마을의 동의를 얻어야 시행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공장은 지었지만 사용은 못하는 이상한 형태의 레미콘 공장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힘든 일이 되고 말았다. 산딸기를 수확해야 하는 참으로 힘든 시기에 날마다 업주로부터 협박이 들어오고 당신만 허락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우리 사업을 망치려 하냐며 정말 죽일 듯이 겁을 주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협박은 정점에 다다랐다.
  
6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 그 레미콘 회사에 민원 해결 업무로 취업한 이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횟집에서 마을 대책 회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네 후배와 몇 사람이 횟집에 모여서 레미콘 공장에 대한 부당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횟집 누나가 한 사람씩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밖으로 나간 동네 후배와 주민에게 조용히 문이 살짝 열린 옆방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김해에서 온 깡패들이다. 오늘 대책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끝장을 보려고 왔다 내. 큰일 났다. 우짤래”
  
겁주듯 말하는 동네 누나의 말에 밖으로 나간 후배와 동내 분들이 갑자기 걱정스러운 눈짓으로 ‘오늘은 가는 게 좋겠다’며 한 사람씩 집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누나는 나를 밖으로 불렀다.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배신감이 감전된 듯 전신을 타고 내렸다.
  
“옆방에 깡패들 보이지 오늘 너 때문에 왔어. 그러니 빨리 동의서에 도장 찍어준다고 하고 합의 봐라 너 잘못하면 큰일 난다. 저 사람들 김해에서 유명한 깡패들이고 업체 사장은 깡패 두목이야. 큰일 내지 말고 그냥 허가서에 도장 찍어주고 말아라.”
  
정말 덩치가 산만한 깍두기들이 십여 명 앉아서 술을 먹고 있었다. 나 때문에 모인 깡패들이 김해에서 날 잡으러 왔고 오늘 허가해준다고 하고 김해시내 가서 술 얻어먹고 ‘동생-형’ 하면서 사귀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성질이 확 올라왔다.
  
“누나 지금 사람 가지고 장난쳐요 진짜 너무하네요. 절대로 안 되니까 맘대로 하세요! 그리고 오늘 여기 깡패들 데리고 온 것 후회할 겁니다. 만약에 내가 다치면 오늘 이 일로 생긴 것으로 알 것이니까 각오하시고요”
  
너무 황당하고 기가차서 겁이 나기보다는 모욕감으로 전신이 감전된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동내 동생이고 어릴 때부터 앞뒷집으로 살아서 서로 살펴줘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데 깡패를 데려다 놓고 협박을 하다니.
  
참으로 인간에게서 큰 배신감을 느꼈고 그때부터 이장은 나에게 더 이상 이장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계속된 압박이 들어왔지만 깡패는 동원하지 않았고 어찌 되었던 합의하기 위해 사람을 계속 보냈다.
  
그리고 늦은 가을 나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 마을 임시회의를 열었다. 그동안 시달림으로 정신적인 피해가 누적되고, 생업에 지장을 받는 일이 계속된데다
할 일은 퇴산이라 마무리할 시점이 왔다고 판단해서였다.
  
“동내 선배님들 김해시에서도 걱정을 하고 있고 레미콘 회사도 일을 못하고 있으니 저들도 죽을 맛일 겁니다.”
  
“이쯤에서 피해를 보는 가정과 마을에 보상책을 내놓고 5년 뒤에는 반드시 철거한다는 조건과 마을에 분진이 날리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며 상시로 물을 뿌려 시멘트 가루가 마을에 유입되지 않는 조건과 분진 감시 기계를 설치하여 상시 점검한다는 조건으로 허가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너무 힘듭니다.”
  
“저는 농부입니다. 농사일에 집중해야 우리 가족도 먹여 살리는데 더 이상 이일에 총력을 기울일 수 없으니 마을 주민 여러분의 의견을 묻고자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는 나의 말을 동의해 주셨고 자연스럽게 마을 보상책에 대한 이야기를 의논하였다.
  
나는 마을의 숙원인 시 상수도를 넣자고 했다. 이곳은 낙동강 주변인데도 갈수기만 되면 지하수에서 간간한 짠물이 올라왔는데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감수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레미콘 공장에서는 이장을 통해 5,000만 원을 합의 조건으로 마을에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보상에 대해서는 빠르게 진행했다.
  
개인의 피해 보상은 받을 수 없었지만 마을의 뜻에 따른다는 동내 분들의 통 큰 선심에 별다른 저항이 없었지만 사후 관리는 철저하게 행하여 다행스럽게도 분진으로 크게 고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집집마다 수돗물이 공급되었다.
  
마을 기금으로 5,000만 원 부담하고 보상금으로 5,000만 원 부담하니 개인에게는 크게 부담 없이 상수도가 보급되었고 우리 마을은 그렇게 수돗물과 질긴 투쟁의 가치를 맞교환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약속대로 고속도로공사가 완공되자 레미콘 공장은 철거되었고 시에서도 최대한 마을에 들어오는 업체는 마을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 마을만이 주변에 공장이 없는 깨끗한 마을로 유지되어 지금은 주택가로써 살기 좋은 마을로 소문이 나있다.
  
<다음 호에 계속>


최석용 대표  liz44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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