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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소설] 행복한 하늘 마당에 황토색 이층집3장 산딸기 첫 수확

산딸기 농사를 지으면서 가정을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생활자금은 어업으로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아이들의 학비와 들어가는 농자금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농업에 필요한 장비 등을 하나둘씩 장만할 때마다 크게는 몇 백이고 적게는 몇 만원씩 들어가는 것이 꼭 필요한 것만 구입하였는데도 정말 만만찮았다.

성공한 농업경제신문의 꿈을 꾸었던 2002년 5월, 자식처럼 돌보았던 산딸기가 오월의 신부처럼 하얗게 꽃이 피었다.

어디에 있다 왔는지 꽃 향을 맡은 꿀벌들이 꽃송이송이 마다 머리를 처박고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꽃잎이 떨어져나가자 작고 파란 열매가 거북이 머리처럼 쑤욱 하고 내밀었다. 작고 귀여운 산딸기열매가 바람에 떨기를 하는데 오월의 햇살과 어울려 조금씩 커지더니 5월말이 되자 열매는 붉은 노을처럼 물이 들었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산딸기만 익으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은 심정, 초보 농부에게 첫 수확의 의미는 첫사랑의 설렘이요, 부푼 희망의 바다에서 고래를 잡는 수부의 작살을 던지는 마음과 같을 것이다.

빨간 산딸기가 우리 농장을 필두로 서서히 익기 시작하자 갑자기 마을이 분주해 졌다. 산딸기작목반원들은 저녁마다 모여 판매대책회의를 하였고 농협에서도 관심이 높아 계통구매계약을 맺었다. 작목반은 열심히 생산을 하고 농협은 거래처를 개척하고 판매를 책임지는 형태였다.

희망이 빨갛게 익은 6월의 길목에서 첫 수확이라는 기쁨을 맞이했다. 산딸기는 약 700평의 모래밭에 탐스럽게 익었고 6월 1일 첫날 수확이 10kg이었다.

생각보다 적은 수확량이었지만 빨갛고 탐스런 산딸기열매 첫 수확의 기쁨으로 설렜고 그 첫 수확의 행복감은 6월의 땡볕에 얼굴이 검붉게 익어도 마냥 행복했다.

10kg의 행복은 무게로 비교할 수 없는 우리 부부에게는 너무 예쁘고 아까워서 한 알도 먹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마당에서 놀던 4살배기 아들이 언제 왔는지 산딸기바구니에 손을 넣어서 한 움큼 쥐고는 먹어버렸다.

나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야단을 쳤다. 아들은 서러워서 울었고 나는 산딸기가 너무 아까워 속이 상했다.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먹었는데 너무하다고 핀잔을 주었고 이게 아닌데 괜히 미안하면서도 첫 수확의 기쁨이 순식간에 아들의 입속에 들어가는 것이 왠지 심통이 났었다.

그리고 생do 처음으로 농협을 통해 경매장에 내 이름으로 산딸기를 처음으로 출하했고 새벽에 경매가격이 통보됐다. 첫 출하의 경매가격은 7500원이었고, 10kg 산딸기 가격은 7만5000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은 30kg 정도를 수확해 20만원 가까이 소득을 올렸다. 3일째 되는 날은 산딸기가 하루에 50kg으로 제법 많이 수확이 되었지만 가격이 5000원선으로 뚝 떨어졌다.

동시에 농협에서 큰 마트와 계약이 체결돼 1kg에 5.000원에 납품계약이 체결 되었고 일정물량의 발주가 들어오면 작목반에서 2kg씩 포장해 계약물량을 납품했다.

그런대로 만족할 수준이었고 농민들도 잘 따라 주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긴 날은 그로부터 5 일째였다. 산딸기작목반을 만들어 농협에 출하를 시작하자 중간에 보따리 상인들이 끼어들었다.

예전에는 보따리상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가격을 주물렀는데 농민들이 계통출하를 시작하자 가격은 고사하고 산딸기를 구입조차 못하던 상인들이 작목반원들의 농장에 들어가 출하 대기 중인 산딸기를 100 ~ 200원씩 더 주고 산딸기를 중간에 가로채기를 하고 있었다.

하루에 계약물량이 정해진 계통출하 산딸기는 물량을 확보해 마트에 보내야 계약이 계속 유지가 되는데 돈 몇백원 더 준다는 상인들의 꾐임에 빠져 가로채기를 당하고 있었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농협에서는 산딸기 안준다고 전화가 오고 농장으로 달려가 보면 상인들이 중간에 싹쓸이 하고 있고 농민들은 한 푼이라도 더 준다는데 왜 못 주냐며 핀잔을 주고 상인들은 당신이 뭔데 이러냐며 멱살을 잡히고 나는 내 농사는 뒷전이고 작목반원들의 설득에 더 공을 들여야 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산딸기를 비싼 가격에 팔아 본적이 있습니까?”

“이게 다 계통출하로 판매망이 안정되니 가격도 안정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작목반이 할당받은 계약물량을 준비하지 못하면 마트에 납품을 못합니다. 그럼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농민들에게 이야기했다.

“농협은 손을 땔 것이고 마트에 납품은 불가하며 다시 옛날처럼 중간상인들이 정해주는 가격으로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좋으시다면 하시고 아니면 할당물량은 채우고 나서 일반상인들에게 주십시오!”

다행이 간곡하게 부탁하자 농민들이 어느 정도 수긍해주었다. 100% 만족은 못했지만 농협을 통한 계통출하는 계속 할 수 있었고 훗날에 큰 작목반으로 성장하고 전국으로 김해상동산딸기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된 물량확보 전쟁은 하루 종일 전화 통화를 해야 할 만큼 힘이 들었다. 그래도 모자라는 물량은 우리농장에서 대체해서 보내곤 했는데, 참 나쁜 것은 3년 뒤에 작목반이 완전히 활성화되자 농민들이 돈 되는 마트물량을 반장이 더 많이 보냈다고 작목반회의를 소집하였는데 기가 막혔다,

한마디로 이게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히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으로 조용히 작목반장직을 내려놓았고 오히려 농업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이웃이었지만 성씨위주로 친척끼리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이다 보니 친척이 없는 나는 때로는 좋은 입질거리였다고 보면 된다.

농촌이라는 곳이 조용하고 인정이 넘치는 곳 같지만 내부에는 친척간의 혈통과 오랜 친목 관계가 끈끈하게 자리 잡혀있어 단순하게 보고 정착하려고 들면 상처받기 딱 좋은 곳이다.

말 그대로 정착민들한테 나는 굴러온 돌이다. 같은 정착민으로 자리 잡기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한 곳이고 어릴 때 살았던 곳이었는데도 이런 이해관계를 생각지 않고 참 단순하게 생각하고 정착하려고 했던 것 같다.

6월 10일 쯤 되자 수확량은 한물이라는 표현으로 하루에 100kg까지 딸 수 있었지만 농협에서 계통출하를 잘 유지하여 준 덕분에 경매가격은 4000~5000원대로 유지 됐고 6월 20일 이후부터는 산딸기 수확량이 급하게 줄었고 장마까지 들자 산딸기 품질이 떨어져 더 이상 수확을 할 수가 없어 마무리 했다.

다른 농장에 비해 규모가 작았고 경험이 미천하여 산딸기나무가 무성하지 못한 우리농장은 생각보다 수입이 적었다.

첫해 판매수입은 겨우 700만원이었다. 농자재비 빼고 인건비 주고 나니 겨우 순수익은 200만원 남았다. 일 년을 고생하며 죽을 듯이 일했는데 순수익이 겨우 200만원이라니 갑자기 농업에 대한 환상이 걷혀졌다 .

어릴 때 어른이 하는 농사를 보고 자란 것은 맞지만 농사에 대한 기본지식은 정말 형편없었던 나에게 이러한 수입은 혹독한 시련과 같았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장모님에게 야단을 들으며 나무를 돌봤지만 초보농사꾼의 산딸기 밭은 왠지 어설펐고 수확만 하면 큰돈을 벌줄 알았던 순진한 마음은 바보 같았다.

주변에서는 제가 무슨 농사를 짓는다고 들어와서 농사꾼 흉내를 내나 하면서 수군거림도 참으며 상인들과의 한바탕 전쟁도 치르며 선배농업인들을 설득도 하며 부농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참 열심히 했는데, 1년 동안의 기다림과 설렘은 20일이라는 짧은 수확기와 한 달 생활비도 안 되는 200만원을 쥐어주고 2002년은 그렇게 힘든 여름을 지나게 하였다.

허탈한 심정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농사를 짓겠다고 할 때 비웃던 사람들의 그 모습이 떠올라 도저히 자존심을 나 스스로 짓밟을 수 없었다.

남들에게는 “올해 수입이 좋았습니다. 큰돈은 못 벌었지만 생활비는 벌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허세를 부렸다.

그게 내 자존감을 지키는 오기였다. 200만원이 1년 수입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첫술에 배부르지 않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강한 의지가 필요했고 어디서 그런 힘이 또 생겼는지 더 열심히 농장에 땀을 더했다.

그리고 700평의 산딸기농장에서 모종을 더 내어 2000평의 제법 큰 농장으로 만들어 갔다. 내 가족의 생계가 여기에 있는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잖은가. 주어진 농토에 내가 가진 땀을 몽땅 뿌리는 것만이 정답이었다.

산딸기농사를 지으면서 장모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도와줘 빈 땅에 고추, 무, 배추를 심었고 조금 익숙해졌는지 가을에는 그래도 친척들에게 무와 배추를 뽑아 시골에 사는 정으로 보냈고, 참모래 밭에서 자란 채소는 일반 토지보다 맛이 좋아 찾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는데, 인근 식당에서 주문이 들어와 남는 것은 팔았고, 약간의 수입이 더해져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풍족했다.

고추는 50평 정도의 작은 하우스에 심었는데 나무가 찢어질 만큼 고추가 병도 안걸리고 많이 열렸다. 장모님은 내 태어나서 이렇게 잘된 고추는 처음 본다고 하였을 정도였다.

문제는 산딸기 수확시기와 고추 따는 시기가 겹쳐서 시간이 나면 대충 따서 경매장에 보냈는데 가격이 신통찮게 나와서 그냥 빨갛게 익혀서 말렸다.

장마 때와 겹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고추 다시는 안 말린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한참 뒤에 고추농사하시는 분한테 들었는데 고추경매가가 왜 적게 나왔는지 이유를 알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과 함께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들었다.

고추는 연할 때 따서 경매장에 보내야 제값을 받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고추가 육질이 단단할 때 수확해서 보냈으니 일명 늙다리 고추가 되어서 경매장에 간 것이었다.

좀 더 일찍 식감이 보드라울 때 따서 보내야 하는데 잘 익혀서 보낸다고 했으니 결국 토마토를 빨갛게 익혀서 보내는 꼴이 되었던 것이었다. 하여튼 정말 열심히 농사일을 배우며, 좌충우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하나씩 배우면서 농부가 되어갔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힘들었지만 또 하나의 삶의 버팀목이 있었다.

새벽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그물질을 하였는데 그래도 고기로 잡은 수입이 괜찮아 넉넉하진 않지만 큰 빚은 내지 않을 만큼 생활에 보탬이 되었다.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이른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은 정말 힘든 날의 일상이었지만, 밤새 쳐놓은 그물에 커다란 고기가 걸려 그물을 추이는 손끝의 느낌이 좋아 새벽마다 희망을 잡는 것 같아 너무 좋았다.

그해 사계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얼굴이 벌겋게 익고 옷에 땀 내음과 거름냄새가 배어들었지만, 힘들다 소리 한번 못하고 정말로 죽을 듯이 열심히 하였다.

내년에는 기필코 가족을 위해서 만족할 만큼 소득을 내리다. 첫해의 첫 수확은 허탈함과 오기 그리고 농업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는 모진 해였다. 2002년 하지만 그 시련이 나에게 도전하는 본능을 깨운 해이기도 하다. <다음호에 계속>

<작가소개> 

경남 김해에서 산딸기 농사를 짓는 최석용 산딸기닷컴 대표는 신지식농업인으로 선정된 농업경제신문이다. 산딸기 작목 WPL 현장교수와 인제대 평생교육원 강사, 김해생명고 외래지도교사,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으로 있으며 앞으로 농업경제신문에서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소설로 연재한다.

연승우 기자  dust8864@thekp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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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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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민 2017-08-15 14:45:49

    글 잘 읽었습니다.
    그 역경을 혜쳐나가시는 모습이 눈에 선히네요
    고생하셨어요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청실과 홍실이 꼬여가는 것처럼 행은 불행을 가셔오고 불행은 행을 가져온다고들 알하는데 이제 고생하셨으니 좋은 일이 정점 많아질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키로 노력하셨으니 이제 잘 살기만 될것 같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으니 이제 하늘에 맡기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복 이 지으세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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